南橘北枳(남귤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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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橘北枳(남귤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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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9.0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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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했다.
온 천하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안영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수인사가 끝난 후 때마침 제나라의 절도범이 옆을 지나가자 영왕은 안영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강남에 귤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은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로 압니다.
” 그 기지와 태연함에 초나라 영왕은 안영에게 사과하고 크게 환대했다고 한다.
지난달 19일 정부는 ‘정부계약제도 개선방안’에 대한 공청회를 열었다.
그동안 ‘재정의 효율적 운용과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활동해 온 정부계약제도개선추진위원회가 개선 방안을 설명하고 의견을 듣는 자리였다.
700여 개의 객석은 공청회를 시작하기 30분 전에 모두 차버렸고 공청회 자료 역시 일찌감치 동이 났다.
건설업계와 유관 기관들이 이번 계약제도 변화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청회에서 설명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안타까웠다.
정부가 계약제도 개선 방안이라는 그릇에 우리의 현실을 담아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동안 저가·덤핑 낙찰로 문제를 일으켰던 최저가낙찰제가 유예 기간을 두었지만 100억원 이상 공사로까지 확대되고, 이로 인해 적격심사 대상 공사 역시 100억원 미만 공사로 축소된 점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운찰제적인 평가를 개선한다는 이유로 적격심사제에서 낙찰 가격은 유지되도록 하고 공사수행 능력과 가격 점수의 합이 최고인 자를 낙찰자로 선정토록 함으로써 기술 능력이나 실적 우수자 순으로 결정하게 되어 낙찰 순번이 고정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높아졌다.
지역제한 공사에서는 지역 내 상위 업체가 적격심사 공사를 독식하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결국 현재 적격심사 대상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8만 개 이상의 중소 건설업체(일반, 전문, 전기, 정보통신, 소방 등)들에게 건설업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꼴이 될 것이다.
정부 정책 및 제도에 대한 중소 건설업체들의 불신감이 커지고 반발 또한 극심해질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물론 적격심사시 운찰제적 요소를 개선하는 방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무시하고 선진국의 입찰 시스템만 좇아서는 안 된다.
선진국에서는 지명 경쟁이 용인되고 발주자의 권한과 책임이 절대적이지만 우리의 사회적 환경은 이와 다르다.
당해 실적이나 기술 능력이 유사하여 업체간의 절대적 우위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운에 의한 낙찰을 배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심사 기준은 조달청 용역을 통해 구체화한다고 하였으나, 일부 업체가 수주를 독점하는 폐해를 방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 반드시 마련되지 않는다면 개선이 아닌 개악이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순수내역입찰제를 적용하고 있다고 해서 이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개선안에 의하면 모든 공사에 순수내역입찰을 도입하고 300억원 이상의 모든 공사에 물량내역의 수정을 허용하되 준비 기간을 두어 단계적으로 시행토록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견·중소 업체들이 숙련된 견적 인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전면적으로 도입할 경우 대·중소 기업간 수주 편중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또한 고도의 심사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발주기관이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순수내역 및 물량내역 수정 허용은 발주기관의 심사 능력과 발주 공사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택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순수내역입찰은 물량내역서를 교부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물량내역 수정 허용 대상(2010년, 1,000억원 이상) 이상의 공사(예컨대 1,500억원 이상 공사)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물량내역 수정 허용의 경우에도 입찰자가 물량내역을 수정한 부분에 대해서만 물량 산정의 오류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저가심의제는 현행의 2단계 심사(객관적 심사, 주관적 심사)에서 1단계(객관적 심사)를 폐지하도록 하였는데, 1단계 폐지시에는 저가 심의를 통해 무분별한 저가 입찰을 방어하는 것에 한계가 있어 덤핑 문제의 해소가 어렵다.
최저가낙찰제는 최저가 1방식을 유지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저가 심의를 강화하여 덤핑수주를 못하게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과다하게 많은 입찰 참가자 수로 인해 적정 업체를 산정해내는 시스템의 선택에 어려운 점이 있는 만큼 무자격 페이퍼컴퍼니의 퇴출 등을 통해 견실한 업체가 공사를 수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선진국처럼 발주기관별로 PQ 대상을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하는 것은 발주기관에 자율적 책임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진국과 달리 발주기관이 공정성·자의적 집행 여부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발주기관별로 PQ 대상 여부를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하는 것은 다소 시기상조이다.
PQ 기준의 변별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경우 소수 업체만이 입찰 참가가 가능해져 대부분의 업체는 입찰 기회마저 빼앗기게 되고, 결국에는 수주 양극화가 심화되어 중소 업체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더욱이 PQ는 입찰참가 업체들이 해당 공사를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요건을 확인하는 제도인 만큼 변별력 기준을 최소화해야 지 인위적으로 입찰 참가자 수를 제한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연대보증인제도는 폐지될 경우 과다한 보증금 부담이 우려되므로 당분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폐지시에도 발주자의 리스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중소 업체의 수수료 부담을 고려하여 계약 보증금은 10%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기술제안입찰은 현행의 대안입찰제도와 입찰 절차가 매우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설계비 보상이 없어 입찰 참가의 애로가 있는 만큼 턴키·대안입찰공사에서의 설계보상비와 같이 기술제안입찰에서도 기술제안 보상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의 계약제도 개선 방안에는 중소기업에 대한 배려를 확대하고, 계약제도를 투명화하는 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강남의 귤이 강북에 옮겨 심어져 탱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에게 맞는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린 아이에게 너무 큰 옷을 입혀 놓고서 벌써 어른이 되었다고 좋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현실에 바탕을 둔 제도 개선 내용이 반영되어 제도 변화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고 실익을 얻을 수 있는 대안을 검토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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