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들] 건축공학계의 슈퍼맨을 만나다
상태바
[사람과 사람들] 건축공학계의 슈퍼맨을 만나다
  • 이태영 기자
  • 승인 2008.04.07 1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만난사람:경제부 이태영 차장 경제부 최효연 기자▣ 국내최초로 건축재료.시공학 연구실 개설김무한 교수는 한국 콘크리트 공학계의 최고권위자로서, 36년간 충남대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난 2월말 정년퇴임했다.
그가 충남대 교수로 첫 부임할 당시(70년대) 건축생산시스템은 설계분야의 비중에만 치우쳐 있었다.
어느 시공자가 시공을 해도 설계자만 같으면 ‘동일한 건축물이 된다’는 사고가 정당화되었던 시대였다.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재료시공, 구조 등의 세분화 및 전문화된 교육은 결여된 채였다.
건축생산에 있어서 설계와 시공의 관계는 음악에 있어서 작곡과 연주에 비유할 수 있다.
설계도서는 악보에, 시공은 연주에 대응한다.
‘악보에 충실한 연주’라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며 ‘연주가로서의 창조성이 없다’면 훌륭한 음악이 창조될 수 없다.
작곡가나 연주가 모두 음악가인 것처럼 설계자와 시공자도 모두 건축가인 것이다.
선진화로 도약하기 위해 ‘재료·시공 분야의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고 생각한 김 교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콘크리트 공학을 전공 해, 국내 최초로 건축재료·시공학 연구실을 개설한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건설생산체계를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기술집약적인 산업으로 바꾸는 선구자 역할을 한다.
▣ 열악한 환경에서 피어오른 꽃들....당시 연구실 환경은 취약했다.
파워포인트 대신 도트프린트로 원고를 출력했다.
표와 그림은 수작업을 통해 오려 붙이는 작업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만, 학술발표를 진행할 수 있었다.
빵과 우유로 끼니를 대신하며 연구에 몰두하는 일도 잦았다.
어느 날은 연구실에 생쥐 한 마리가 침입해, 초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자정이 넘도록 세미나를 하고 휴일에도 연구과제에 대해 토의했다.
방학을 반납한 체, 실험·편집·측정의 강행군이 연속되는 치열한 연구과정 속에서 제자들은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가 배출해낸 200여명의 석·박사 제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피어오른 꽃들인 셈이다.
김 교수가 입지를 다져주고 물과 거름을 뿌린 것이다.
그 당시 콘크리트 공학이라는 학문은 황무지 상태였고, 김 교수는 주위의 만류와 부정적인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외로움과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그는 학생들과 ‘소통의 장’을 마련해 ‘꿈과 희망’을 보았다.
그에게는 교수의 위엄과 명예보다도 초롱초롱한 눈매의 학생들이 위안이자, 비전이 되었던 것이다.
교수들과의 담합과 친목도모에 앞서, 지치고 배고픈 제자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사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 청년시절의 역경과 고난이 "그를 만들다"김교수는 ROTC 출신으로 월남전에 참전해, 비명과 총성이 난무하는 열대정글에서 살아 돌아온 ‘열혈남아’이기도 하다.
38개월의 전투생활을 포함해 열혈청년장교로서 7년간의 장교생활을 마친 후 충남대 건축공학과의 전임교수로 부임 한 것이다.
청년시절의 고난과 역경이 그의 심지를 굳건케 했다.
건축 재료나 건축 생산기술 분야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야겠다고 다짐한 후 첫 번째 기회가 온다.
열정만으로는 부족했던 찰나였다.
화란 정부장학금을 지원받아 화란 바우센트룸에서 건축학 디플로마(Diploma)를 받은 것이다.
멀지 않아 두 번째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고려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중 일본 문부성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일본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김 교수는 건축 재료 및 건축생산공학을 심도 있게 연구 할 수 있었고, 콘크리트 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러던 1994년 제1회 한국콘크리트 압축강도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이라는 한혈(汗血)의 결정체를 이루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 교수가 인솔한 연구팀은 1995년, 1996년 연속 3연패의 쾌거를 누리게 된다.
실로 대단한 결과였고, 공개석상의 타대학 연구팀들은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었다.
김 교수의 연구팀은 탄력을 받아 1995년 일본의 다이세이(大成)건설에서 주최한 국제콘크리트 압축강도 콘테스트에 참가했고, 준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이러한 성과를 내기 위해 밤을 새운 것은 부지기수이고, 품질이 좋은 골재를 구하기 위해 제자들은 전국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이 후 우리나라의 콘크리트 기술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고 그 바탕에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이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맞느니라’는 말씀에 따라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결심한 김 교수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 결과 국내 제3회 콘테스트에서는 압축강도 3116 kgf/cm²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했다.
당대 김 교수의 연구팀들과 견주었던 굴지의 명문대 연구 실적이 압축강도 500kgf이내로, 이와 대조돼 실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김 교수의 실적이 가시화되자, 한간에서는 불이익을 우려해 쉬쉬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학회에서는 ‘장이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충남대 연구팀이 대회에 불참할 것을 유도했다.
▣ 세계로 눈을 돌리다그는 국내에서 눈을 돌려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시작하고 제자들을 현장견학에 참가하도록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교수의 교육방침으로, 보고 느끼도록 하며 실제적인 견문을 넓히도록 독려했다.
이는 교수가 현업에 있을 당시 깨우친 바였다.
김 교수가 유학 시절(1973년) 콘크리트를 비빌 때에는 장갑을 낄 수가 없었다.
굳지 않은 콘크리트를 손으로 만져보면서 그 촉감으로 콘크리트의 워커빌리티(시공연도)라든가 강도를 감지하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는 지도교수님의 간곡한 말씀 때문이었다.
김 교수가 실험 중에 묻은 콘크리트를 손에서 씻어내고 맨소래담을 바르던 추억을 상기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연구다운 연구이며, ‘불굴의 도전정신’이 된 밑거름이었다.
그 당시 교수의 결혼반지에 묻은 콘크리트는 ‘산 증표이자, 영광의 도장’이 되었다.
콘크리트의 강도와 내구성이 얼마나 우수했길래 오늘날까지 불청객으로 반지에 붙어있을까.▣ 후학들의 삶의 지표김 교수의 가르침 아래 성장한 제자들은 건설업계 및 각계각층에서 중추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이들에게 김무한 교수는 ‘늘 푸른 사시나무처럼 충남대를 지키는 스승이자, 삶의 지표’가 되었다.
교수는 정년퇴임 후, 종료되지 않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종종 학교에 나오고 있다.
또 연구에 매진하느라 충실하지 못했던 가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정년 퇴임을 앞두고 마련한 전원주택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건축 시공 및 생산공학, 알기쉬운 콘크리트 공학 등의 저술활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무한 교수는 이제 강단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 교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때다.
그가 길러낸 후학들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며 한국 콘크리트공학계의 거목으로 건설인의 기억속에 남겨질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계속되어야 한다.
■ 김무한 교수는...대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동 대학원에서 건축재료 및 시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ROTC 3기로서 임관해 월남전 38개월을 포함, 7년간 공병장교 생활을 하고 충남대 교수로 부임했다.
화란 Bouwcentrum에서 건축학 디플로마를 받고, 고려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중 일본 유학을 했다.
그 후 콘크리트 공학을 전공해 콘크리트산업의 발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으며, 건설현장의 ‘건설폐기물’재활용과 관련하여 이미 20여년 전에 중요성을 언급하고, 가장 먼저 연구에 착수해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의 건설폐기물 재활용 기술 보유국으로 발돋움하는데 구심점이 되었다.
■ 주요 수상경력-1993.4.25 대한건축학회 학술상 수상-1996.11.9 한국콘크리트학회 학술상 수상-1994.10.1 대전광역시 문화상 수상-1995.11.5 국제콘크리트 압축강도 콘테스트 우수상-1996.11.27 국제콘크리트 압축강도 콘테스트 우수상-1994.8.26 한국콘크리트학회 압축강고 콘테스트 최우수상-1995.8.31 한국콘크리트학회 압축강도 콘테스트 최우수상-1996.10.18 한국콘크리트학회 압축강도 콘제스트 최우수상(3연패)-2003.5.25 충남대학교 30년 근속 표창-2005.11.5 한국콘크리트학회 논문상 수상-2007.9.25 대한건축학회 건설교통부장관 포상-2008.2.29 황조근정훈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