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여행기]안장성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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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여행기]안장성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 상무
  • 오세원 기자
  • 승인 2023.08.17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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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군함도는 광기의 산물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안장성 상무

군함도(端島, はしま)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韓을 찾아서’란 역사탐방투어를 통해서 군함도를 찾게됐다. 우리이름으로는 말도라고 불리워질 듯한 하시마(はしま)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県, ながさきけん) 나가사키 항으로 부터 서남쪽으로 약 18.5Km 떨어져 있는 무인도이다. 1810년 석탄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쓸모없는 무인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1890년 미쓰비시(三菱, みつびし)가 섬을 매입하고 석탄채굴을 위한 6번의 매립과 확장을 통하여 현재의 군함도 지형을 갖추게 되었다.

미쓰비시가 석탄채굴을 시작하면서 군함도는 당시 일본에서도 제일가는 번성을 이루고 있었다. 한때는 무려 5300여명이 거주하는 소도시로 인구밀도가 도쿄의 9배이상 되었다고 한다. 군함도는 한눈에 봐도 마치 요새처럼 섬 전체가 콘크리트 옹벽으로 둘러싸여 철옹성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듯하다. 1916년 군함도에는 일본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7층짜리 철근콘크리트 아파트가 건립되었으며, 아마도 당시 젊은이들이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대도시에서도 귀한 TV, 냉장고, 세탁기 등 유인책으로 화려하게 치장해 놓았지 않을까 싶다. 현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식되고 낡은 초라한 모습으로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과 부대시설이 퇴색한 모습으로 앙상하게 남아있다.

/사진=안장성 상무 제공
/사진=안장성 상무 제공

당시 군함도는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인력의 충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탄광의 특성상 정상적인 근로환경으로 근로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족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1938년 국가총동원법의 공포와 더불어 강제연행을 시작하고 1941년 태평양전쟁 등으로 부족한 인적·물적자원을 착취하기 위한 만행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한국은 이미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압적 병합으로 주권마저 빼앗겨 더욱 황폐되어가고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한국에서는 보국대(報國隊)라는 이름으로 젊은 청장년을 일본 각지의 노동현장에 투입하게 되었다. 이곳 군함도에도 많은 청장년이 동원되어 석탄 채굴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군함도 탄광을 전혀 선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진=안정성 상무 제공
/사진=안장성 상무 제공

또한 보국대에 자원 또는 징집이란 형태로 이곳에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개발되어온 터라 당시 갱도 깊이는 이미 1km에 이르는 60도 이상 수직에 가까운 막장으로 투입되어 채굴했다고 한다. 갱도 안의 온도는 섭씨 45도에 달하는 온도로 거의 불지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채탄을 위하여 좁은 막장으로 갈수록 적은 체구가 필요하여 더욱 소년들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군함도에는 당시 강제동원된 인원이 대략 4∼500여 명이며 열악한 환경으로 질병과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한 인원이 한국인만 6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나가사키평화자료관에는 군함도 탄광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명단을 볼 수 있다. 과연 국가총동원법 시행이후 자발적으로 간 사람이 있을까하는 의문이다. 전쟁말기 극심한 노동력 부족으로 강제적으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다. 이곳 군함도에서도 많은 일본인도 희생을 당했다. 아마도 화려하고 다양한 시설, 그리고 고층빌딩이 파라다이스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안장성 상무 제공
/사진=안장성 상무 제공
/사진=안장성 상무 제공
/사진=안장성 상무 제공

상황에도 明治日本의 産業革命遺産으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2015년에 등재되었다. 군함도를 관광하는 일본인들은 해설사의 달콤한 설명에 젖어드는 듯 하다. 레밍이 집단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가듯이 미쓰비시는 홀릭을 통하여 눈을 멀게하는 것은 아닌지, 그들의 죽음이 현재도 아픔으로 쓰라린 이유일 것이다. 현재도 생존하고 있는 그들은 미쓰미시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다. 일본은 사도섬(佐渡島) 니가타현(新潟県) 소재의 광산을 군함도에 이어 또 한번 유네스코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산업혁명의 유산으로 미화시켜 아픔을 숨기려는 것인지 사도광산에는 더 많은 우리 형제들의 아픔 눈물이 녹아 흐르기에 군함도의 역사왜곡에 이어 또다른 논란으로 남는다. 더 이상 군함도는 광기의 산물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군함도 막장에서 탄가루가 범벅된 주먹밥으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며 살아남은 이와 끝내 살아나오지 못한 많은 이들의 아우성과 외침이 메아리로 들려오는 것은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의 주름이 깊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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